구급함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출판사 현암사가 '팔순잔치'를 앞두고 '현암이' 인형 키링을 만들었다. 현암이는 팔다리가 짧은 둥그런 까만 돌 캐릭터로 머리 위에 푸른 이끼가 살짝 얹혀 있다. 현암사가 검을 현(玄), 바위 암(岩) 자를 쓰기 때문이다. 1945년 우리말과 글을 되찾은 해에 현암 조상원 선생이 창립했고, 그의 손녀 조미현 대표(55)가 현재 3대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매일경제와 인터뷰한 조 대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80년 된 기업이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암이 캐릭터를 만든 것도 젊은 감각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어 "직원들한테 책은 45세 정도 감각으로 만들자고 늘 말한다. 살아보니 45~50세가 가장 좋은 나이더라. 아직 젊음의 용기는 있으면서, 너무 무모하지도 않다. 그런 시각으로 책을 내는 출판사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조 대표는 서울국제도서전(6월 18~22일)에서 열 팔순잔치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는 "도서전에서 독자들에게 나눠줄 현암이 캐릭터가 들어간 다양한 팔순 기념 굿즈를 준비했다. 이후 7~8월에는 현암사와 현암주니어의 저자 9명이 모여 80주년을 기념한 인문학 강연을 정독도서관에서 릴레이로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초기 현암사는 스테디셀러인 고전과 법전을 출간하며 주목받았다. 1950년대부터 최초의 한글세대를 위한 완역 '사서삼경'을 출간했다. 이후 동양의 명저 '채근담'을 출간해 60년 넘게 사랑받았고, 안동림의 '장자'도 30년 넘게 사랑받고 있다. 조 대표는 "고(故) 안동림의 '장자'는 국내 최초로 전편 완역한 책인데 80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두껍다. 그래서 장자를 3편으로 쪼개 쉽게 엮은 오강남의 '장자'를 출간했다. 오강남의 '장자'가 나오자 안동림의 '장자'를 찾는 독자가 더 많아졌다. 이처럼 어려운 고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1959년 현암사는 '법전'을 처음 선보였다. 현암사의 주력인 '법전'은 매년 새롭게 출간되고 있다. 조 대표는 "사실 '법전(法典)'이라는 단어는 할아버지가 처음 만든 말이다. 상표권이 풀리면서 사전에 등재됐다. 우리나라 법전이 일본식 육법전서를 탈피하고 조선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승계한다는 의미로 경전 전(典) 자를 썼다더라"고 말했다.

몇 년 전 바티칸의 '피에타상' 앞에 섰을 때 보았던 마리아의 왼손이 생각난다. 둘 곳 몰라 헤매는 어머니의 왼손. 아들을 감싸안지 못한 어머니의 그 손은 뼈저린 탄식 같았다. 망연자실 넋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 어찌할 바 모르는 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드러내지 못하여 내면으로 돌진하는 어머니의 뜨거운 오열이 떠돌던그곳. 아들의 주검을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고통에 '어찌 하오리까? 되돌릴 수 없나요?'란 비탄이 가득 찬 듯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그것은 짐짓 평온한 것처럼 보이나 참척의 절정이었다.

꼭 다문 입술에 내면의 고통을 숨긴 마리아처럼 소설 '입동'의 부부 역시 슬픔의 극치를 침묵과 바꿨다. 상실과 애도를 노출하지 못하는 절제의 방식이 마치 현대판 피에타 같았다. 드러내지도 도려내지도 못한 슬픔 안에서 부부는 참척 이후의 삶을 붙잡느라 애썼다.

차가운 시간 속으로 따뜻한 생명이 사라진 후 부부의 마음은 차디찬 대리석처럼 식어갔다. 일상이 비통이었던 것처럼 거기에 잠겨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닥친 고통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삶은 표현 불능일 수도 있겠지만 이웃이 자신의 슬픔을 관찰한다는 느낌 탓도 컸다.

한번은 아내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십 분 만에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길 본다고, 나는 안 그러냐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 김애란 단편집 <바깥은 여름>에 실린 '입동' 중 28쪽, 큰글자책

자식 잃은 부모는 '밝은 색 옷을 입어서도, 웃어서도 안 되지'처럼 암묵적인 기준 사이에서 자기만의 애도를 꺼내지 못해 고립을 겪는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데 자꾸 타인의 시선이 끼어들어 참견한다. 아내가 상실 이후의 삶에서 온전한 애도를 누리지 못한 데는 슬픔의 형식을 요구한 타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다.

대형 참사 발생 시에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일어나는 걸 우린 보았다. 슬픔의 끝을 사회가 관여하고 권유하여 일찌감치 종결하려 드는 것도 지켜봤다. 사회적 억압에 눌린 수많은 부모들이 애도의 자유를 뺏긴 채 슬픔을 삭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을.

충격으로 넋이 빠져 있던 한동안이 지나자 참사 자체를 일상에서 떼어 내서 원격지로 몰아 고립시키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슬픔이라는 정서는 전망 없고 폐쇄적인 심리 현상이고 한恨에 침잠해 있으면 개인의 삶은 퇴행하고 국가 경제가 오그라져 먹고살기 어려워진다고 말 힘 좋은 논객들이 말했다.(김훈 산문 <허송세월>에 실린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어져 있다' 중 115쪽)

그들도 처음엔 함께 탄식하고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찰자로 입장을 바꿨다.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그만 울라며 다그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울부짖음이, 우울이 내 것이 될까 두려우니 끝을 내라고 압박하면서.

끝을 정했으니 이후의 울부짖음은 칭얼거림으로 간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식으로 슬픔을 차단하려 들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에서 말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알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왜 학교에서는 '슬픔학學'을 가르치지 않는가. 혼자 공부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런 벽에 부딪힌다. 예컨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뿐이다,라는 벽.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내가 아는 슬픔은 내가 느낀 슬픔뿐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부딪힌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진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다. 영원히 알 수 없다면, 영원히 공부해야 한다.(신형철의 시화詩話 <인생의 역사>에 실린 '언제나 진실한 것은 오직 고통뿐' 중 48~49쪽)

우리에겐 직접 경험한 슬픔만 내 것이 되는 한계가 있으므로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이해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나의 기준'으로 타인을 해석하지 않으려면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시선을 배워야 한다. 타인의 슬픔은 언젠가 내 것이 되기도 하므로 타인의 슬픔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나를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모르니까 더는 못해'에서 끝나면 타인의 슬픔은 고립되고 억압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해될 때까지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참척이란 회복되는 게 아니라 사는 내내 따라다니는 슬픔이다. '하나 더 낳으면 되지,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란 위로는 오히려 무지한 폭력일 수 있다. 회복해야 한다고 서두르기보다는 충분히 애도할 시간과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 주변과 사회가 취할 자세라는 걸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에 실린 또 다른 단편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풍경의 쓸모',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등 7편의 소설들이 가진 상처나 상실 중엔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허다하다. 우리의 것으로 이해하려면 알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 그래야 참척의 아픔과 이별의 상처, 청년 실업의 고뇌가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하려고 우리에게 기회를 준 소설이 <바깥은 여름>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문학 영역으로 확장해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했다. 박경리 here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 황석영 대하소설 '장길산' 등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여럿 출간했다. 조 대표는 "시인 박목월 선생과 할아버지가 서로 힘들 때 북돋워주고 끌어주는 평생의 벗이었다. '현암'이라는 호도 박목월 선생이 지어줬다더라. 현암사에서 1968년 '청록집 기타' '청록집 이후' 등을 출간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현암사는 인문 도서를 주로 출간한다. 특히 국내도서와 외국도서를 8대2 비율로 출간하는 철학을 지키고 있다. 그는 "국내 도서는 저자와 함께 책을 만들다보니 예정대로 날짜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작가의 우리나라 글로 된 좋은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 현암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8대2 비율을 꼭 지키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2009년부터 현암사를 이끌어온 조 대표는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이 많다. 현암사의 표어도 '더불어 삶, 더불어 책'이다. 그는 "(표어 때문에 가끔 정치 관련 오해를 받지만) 정치적 책은 최대한 배제하고, 책을 통해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게 늘 목표"라고 밝혔다. 이 같은 철학이 담긴 책으로는 최근에 출간한 김기석의 '최소한의 품격'과 김관욱의 '몸'이 있다.

향후 현암사의 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아카이브화할 계획이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현암사는 그 자체가 거대한 수장고 같았다. 그는 "자료 정리가 끝나는 대로 정기적인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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